‘공포’ 혹은 ‘병적인 두려움’으로 번역되는 포비아(phobia). 미국정신의학협회(APA)는 이것을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지나친 두려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지러움, 구토, 공상,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져오는 정신 질환이다. 질환의 원인은 아직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다. 질병이나 고통, 죽음에서부터 꽃, 별, 사랑, 아름다운 여인 등 포비아의 종류는 90여개에 이른다. 미국 성인의 10% 가량이 이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게 APA의 분석이다.

남한 사회, 아니 모든 코리안들은 분명 이 포비아를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북한, 전쟁에 대한 포비아, 그것은 가히 발작적이다(남한이나 미국에 대한 북한의 포비아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코리안들을 죽음, 기아, 상처로 내몰았던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남북한은 상대에 대한 불신, 적개심을 끊임없이 확대, 강화해 온 것이 우리 현대사이고, 정치사이기에 말이다. 따라서 코리안들이 앓고 있는 전쟁과 분단의 포비아는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DSD) 증세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국정원 탈북 화교남매 간첩조작 사건’의 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 선명해졌다. 국정원이나 공안 검찰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작을 두 눈 부릅뜨고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모든 탈북자가 잠재적 간첩으로만 보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교가 탈북자로 속이고 들어온 단순 거짓말 혹은 사기 사건을 어떻게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과 연계시킬 수 있나. 그들에게 북한은 국가보안법에 규정했듯 ‘국가를 참칭하는 괴뢰 집단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땅’으로서 반드시 회복해야 할 지역이다. 따라서 북한이 하는 모든 행동,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은 의심,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정원, 공안 검찰, 그들은 전쟁과 분단이 만들어낸 포비아의 희생양인 셈이다.

판사도 마찬가지다. 지난 9일과 오늘(13일) 열린 피고 유씨 관련 여동생의 법정 심문은 이번 사건의 핵심 중 핵심 사안이다. ‘간첩 (조작) 사건’의 진의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는 지난 9일 공판에 앞서 “국정원의 수사기법, 간첩 침투 루트 등이 일반에 공개돼 국가안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검사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덜컥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해 버렸다. 기밀사항을 심문할 때만큼은 비공개로 하고 나머지는 공개로 진행하는 게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모든 재판을 비공개로 해버린 것이다. 13일 변호인 심문에서도 판사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공개재판을 해달라”는 변호인의 요청을 거절한 채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했다. 판사 역시도 ‘보위부’ ‘간첩’이란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해, 그리고 재판을 공개함으로써 사게 될지도 모를 ‘이념 공격’(소위 ‘종북좌파’라고 하는)을 두려워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판사, 그 역시 이 포비아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 지난 9일에 이어 13일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여동생 법정 심문은 비공개로 열렸다. 사진은 방문객용 의자를 옮겨다 법정 앞을 가로막은 채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모습. 포비아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정의와 진실 앞에 용감할 것 같은 기자들도 포비아에 떨기는 매한가지다. 지난 1월 메이저 언론들의 기자들은 유씨를 간첩으로 기정사실화 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아니 모든) 기자(혹은 언론)들은 몇 개월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여동생이 폭로 기자회견을 한 지난 4월 27일부터 기자들은 마치 정의의 투사인양 경쟁적으로 취재, 보도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재판부가 유씨 여동생의 법정 증인 심문을 비공개로 하자마자 다시 침묵 모드로 돌입했다. 헌법에도 보장된 ‘공개 재판’을 비공개로 해버린 재판부를 당연히 성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변호인들이나 피고 측에서 기자회견 등을 통해 ‘법정 증인 심문 내용’을 알리지 않는 이상 진실을 파헤치려는 언론의 노력은 거의 없을 것 같다면 지나친 비관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 역시 감히 ‘간첩 사건’을 파헤칠 용기가 없는, 포비아의 희생자라고 하겠다.

일반 사람들은 어떤가. 북한의 3차 핵실험, 국제 제재, 한미 연합 군사훈련, 개성공단 중단 등 지난 3개월간의 한반도 상황은 ‘준전시 상태’에 다름 아니었다. 남한 사회는 물론 북한 주민들도 상대로부터 촉발될지도 모를 전쟁 포비아에 사로잡혀야 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공포 혹은 ‘비정상적인 두려움’, 즉 ‘전쟁(분단) 포비아’를 앓고 있는 것이다. 코리안,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정신의학에서 제시하는 포비아에 대한 치료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포비아를 직면하는 것이다. 포비아를 피하지 않고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허상(포비아는 실제보다 대상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비합리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포비아의 대상에 다르게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대상이나 상황을 접하도록 함으로써 두려움이나 공포를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포비아는 불치병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평생 포비아를 안고 사는 환자는 10%에 불과했다. 90%는 완치를 경험했다는 뜻이다.

이번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혹은 ‘국정원 탈북 화교남매 간첩 조작 사건’은 한 개인의 유무죄로 볼 일이 아니다. 한 개인 혹은 남매의 비극을 통해 분단이라는 거대한 비정상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유씨 남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포비아 환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포비아 극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남북 화해, 통일의 길도 거기서부터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