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 국가간 경쟁 상황을 설명하는 대표 이론가 중 Paul F. Diehl과 Gary Goertz가 주장하는 단속적 균형 모델이라는 것이 있다. 숙적 국가들의 관계가 생성된 후 4분의 3이 단기간에 소멸하지만, 4분의 1은 lock-in 상태 또는 평면(flat)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도 풀기 어려운 잠금 상태가 현재의 남북한 관계이다. 이들의 연구 결과에서는 대부분의 전쟁이 숙적관계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하고 오랜 기간 정체를 겪은 이후 급격한 변화(Shock)를 거쳐 그 발생과 유사한 형태로 신속한 종식에 직면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점쟁이가 아니라 역사를 기반으로 연구를 하는 집단이다. 숙적관계의 급격한 생성과 평면상태의 돌입, 그리고 다시 가파른 곡선의 종식…. 이론상 남북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급진적이고 거대한 그림은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것인가?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도적처럼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남북통일은 이와 같은 거대한 충격을 수반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곧 상호간 전쟁의 충격이나 북한지역 내 내전, 제3의 구조적인 충격, 민주화와 같은 충격이 될진대(대부분 상대방의 변화에 관한 것) 남한이 그와 같은 충격을 흡수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느냐, 현재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겠다.
국내외적 대북제재는 북한을 두 손 들게 하자는 전략이다. 동의하진 않지만 누군가는 북한사람들을 독재자에게 인질로 붙잡힌 이들로 표현한다. 스톡홀름신드롬을 차용키도 한다. 인질들은 민주화의 경험도, 독재자를 처단할 법적·물리적 장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차 인질범을 압박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오래 가져갈 수 없는 인질범은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남북 경제협력 같은 기능주의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기엔 퍼주기란 말이 대중선동용어로 너무나 고약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남북간 경제적 연합이 정치적 연합으로 spillover 되기까지 사람들의 인내심을 담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진보에서 보수정권으로 넘어가는 2000년대에 확인한 바 있다.
나는 북한 출신들에게 통일을 말하지만 모순점이 너무나 많다. 통일은 빨리 하면 좋은가, 누구에게 좋은가, 통일은 희생이 필요한가, 누가 희생할 것이며 누가 이 게임의 승자가 될 것인가? 흡수통일을 논외로 한 평화통일은 실체가 있는가? 남의 우월함과 북의 궁핍함을 떠나서 그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쳐놓은 이들, 유지에 한몫하는 이들은 역사 속의 죄인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남북한 라이벌리의 종식은 곧 통일을 의미할까. 나는 조금 더 인내를 갖고 사실상 EU식의 남북연합이 테스팅되는 시간을 벌며, 남북간 신뢰를 높여갔으면 한다. 효과적인 제재를 위해서도 대화는 필요하다(더군다나 우리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만한 유인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서로가 여행하고 교류하며 궁극적으로 이주까지 가능한 관계라면, 난 굳이 통일을 말하지 않겠다.
한기호/ 우양재단 과장, 소셜캠페이너 '탈분단통일연구소' 운영자, 연세대 통일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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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kyosoma@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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