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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민간의 역할은?

1990년대 진입을 앞둔 시기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시도한 개혁·개방정책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 전환에 발화점이 됐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국제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안타깝게도 냉전 시대 최전선 중 하나였던 한반도에는 탈냉전의 소용돌이가 오다가 멈춰버렸다. 우리가 소련과 중국 등 북한의 주요 우방국과 수교하면서, 북한 체제 붕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지, 북미수교와 북일수교를 전략적으로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북 교차승인 불발로 한반도 냉전질서는 해소되지 않았고, 30년 이후 다시금 등장한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코앞에 놓여 있다. 이제는 국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대응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미·중 패권경쟁은 2009년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전략에서 읽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아시아 영향력 확장에 대한 견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미국이 단극체제 유지를 위한 대외정책을 지속하는 한 한반도와 동중국해,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로 이어진 지역에 ‘대륙세력 vs. 해양세력’의 충돌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의 위협에 대한 전략적인 강박증에 사로잡힌 미국에서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초당적 합의가 엿보인다. 바이든 역시 트럼프와 유사한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렸던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뉴욕타임즈는 미국 외교 70년의 숙원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아시아의 나토화’를 향한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 네트워크 연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일본은 편승 전략을 펴고 있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한·미·일 정상은 공동위협에 즉각 대응한다고 합의했고.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위협의 대상으로 규정됐다. 이제 한반도 유사시 일본인 보호를 위해 자위대 상륙이 가능하고, 미국이 한국에 일본의 후방지원을 받도록 요구하면 그대로 실행된다. 국방예산은 GDP 2%까지 늘릴 수 있고, 반격능력도 도입이 가능해졌다. 군사력 증강 이후 한반도를 침략했던 역사적 선례에 비추어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은 우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안보에 있어서 또 다른 위협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기 전에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한미일 관계의 또 다른 축인 민간협력을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완성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해야 한다.

비공개로 열린 한일 의원대화 현장. 왼쪽이 한국대표단, 오른쪽이 일본 입헌민주당 의원들.

지난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일본 동경에서는 한·미·일 민간단체와 중국 학자들이 모이는 ‘East Asia Quadrilateral Dialogue 2023’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지역 전문가들로 구성된 KDP(Korea Diplomacy Plaza: 외교광장)와 미국 UCS(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일본의 ND(New Diplomacy Initiative)가 단체 차원에서 참여했고, 중국에서는 북경,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학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평화로 안보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1일차 무기와 안보, 2일차 지역 현안, 3일차 역사, 협력과 시민사회를 소주제로 삼아 총 8개의 세션이 진행됐다. 각 단체의 구성원은 국제 정치, 군사, 평화, 경제, 통상 관련 교수와 전문가로 이루어졌는데, 한국과 일본, 일본과 미국 단체의 기존 네트워크를 토대로 행사가 마련됐다.

행사 말미에는 한·일 국회의원들간 대화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국회 한반도평화포럼 대표인 김경협 의원이 참석했고 일본 측에서는 5명의 입헌민주당 의원이 함께 했다. 동아시아평화를 논할 때 과거사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주제이다. 한 일본 의원은 과거사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한국에 대해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하냐며 불편함을 표시했다. 이에 한국 참여자가 일본의 정치인들이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난 이후로도 A급 전범이 합사된 신사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여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공식 석상에서 논의는 그쯤에서 중단됐지만, 비공개 회의에서 일본 의원은 내부 사정을 털어놓았다. 과거사 문제를 따지게 되면 전쟁 책임을 천왕에게 물어야 하는데 이는 대다수 일본인 정서에 맞지 않고, 여론을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궁색한 변명처럼 여겨졌지만, 일본 정치 현실의 단면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맨 왼쪽이 남기정 교수, 맨 오른쪽은 김경협 의원.

이번 행사에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1905년 포츠머스에서 2023년 캠프데이비드로: 격세유전, 또는 평행세계’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남 교수는 올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이 과거 1905년 미·일이 포츠머스 조약으로 구축했던 ‘극동 1905년 체제’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국 중국을 밸런싱하기 위해 일본을 내세워 구축한 세력균형 체제가 20세기 초 이후 극동의 지역질서로 존재했는데,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두 양자 동맹을 일체화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가치를 내세운(자유주의) 외교의 부정과 힘에 의한 평화라는 안보 부정이 위기를 증가시키고 있는데 핵무장 국가 북한과의 대결 불가피성이 강조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진단했다.

1951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 이후 일본 각지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주둔지마다 미군 성폭행 범죄와 환경오염 문제, 그리고 군 비행체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는 지역 주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데, 주일 미군 부대의 70%가 집중된 오키나와현은 일본 내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낮다. 자연스럽게 미·일동맹과 헌법개정에 비판적 여론이 높은데 ND활동에도 오키나와 출신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주일 미군 문제를 취재하던 토모히로 야라 기자는 오키나와 현의 참의원으로 활약했었고 이번 행사에 함께 했다. 와세다 대학 쿠미코 하바 교수는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지역협력체 구상을 소개하며 오키나와가 국경분쟁이 아닌 평화협력의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 다양한 행위자들이 출연했는데 지방정부인 오키나와가 대만, 제주와 함께 평화와 발전, 소통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 교수의 주장처럼 시민단체 역시 국제사회의 새로운 행위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민간의 국제연대가 분쟁 지역 위기관리에 영향을 미칠 방안 역시 모색되어야 한다.

행사 이후 동경 외신기자센터에서 진행된 기자회견. 왼쪽부터 ND 사요 사루타 대표, UCS 그레고리 컬라키대표, KDP 김준형 이사장.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과 미국, 일본에서 정부의 대외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때 지속적이고 힘있게 추진될 수 있다. 정부가 대다수 국민의 뜻에 반하는 대외정책을 강행할 때 국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실험대가 마련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바이든 정부와 한국의 윤 정부는 전반적으로 35% 내외 혹은 그 이하의 지지율을 보인다. 내년 4월에는 한국에서 총선거가, 11월에는 미국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국가별로 국내 이슈가 혼재하지만, 오늘날 대외정책이 국내의 정치, 경제 등 각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민간단체는 선거기간에 평화정책 관련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칠 수 있다. 민간단체와 지방정부, 그리고 정당의 거버넌스가 평화 정착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윤은주/ (사)뉴코리아 대표, 북한학 박사

윤은주  ejwarrior@hanmail.n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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