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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구상’과 ‘어리석음의 극치’ 사이에서평화재단 현안진단 제287호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의 ‘담대한 구상’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5일 77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북한에 대해 ‘담대한 구상(Audacious Initiative)’을 제안했다(77주년 광복절 기념사). 윤 대통령이 밝힌 ‘담대한 구상’의 내용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프로젝트, 북한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의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 실시 등이다.

대통령실은 추가 설명을 통해 ‘담대한 구상’은 두 가지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선 비핵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며,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비핵·개방 3000’이 비핵화 합의를 전제로 이후 '행동 대 행동' 교환원칙을 제시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비핵화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만나서 이야기하는 과정에 먼저 경제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비핵·개방 3000’이 경제 분야에 중점을 둔 반면 '담대한 구상'은 경제·군사·정치 3대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플랜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경제 분야에서 경제협력 방안들이 결국에는 공동번영으로 나아가는 것, 군사 분야에서는 긴장완화 조치들이 신뢰구축 단계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는 평화구축 조치들이 평화정착 단계로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담대한 구상’은 지난 5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나온 ‘담대한 계획(plan)’에서 확장된 개념이다(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또한 권영세 장관이 청문회 당시 대북정책은 ‘이어 달리기’라고 표현한 것처럼 ‘담대한 구상’은 역대 대북·통일정책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해 공무원 피격 사망사건, 북송 어민 사건 등 남북관계의 민감 사안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가 큰 틀에서 남북협력의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기의 ‘한반도 비핵화’라는 중립적 용어와 달리 ‘북한 비핵화’라는 개념을 사용해 비핵화의 개념과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 94번 ‘북한 비핵화 추진’ 분야에서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자로서 대북정책의 국제공조를 ‘주도’하겠다고 명시함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해 적극적인 관여 의사와 함께, 당사자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광복절 77주년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어리석음의 극치’로 응답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

8월 18일 김여정 부부장은 매우 거칠고 직설적인 담화를 통해 ‘담대한 구상’에 대해 즉각 거부했다(김여정 담화 전문). 김 부부장은 ‘담대한 구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이미 “동족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 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고 단정했다. 또한 김 부부장은 “누가 자기 운명을 강낭떡 따위와 바꾸자고 하겠는가”라고 언급함으로써 ‘담대한 구상’을 실현 불가능한 ‘안보 대 경제 교환론’으로 평가절하 했다.

김 부부장은 북한의 핵 개발 중단을 촉구한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주제넘은 일이라고 비난하고, “북이 비핵화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헛된 망상’이라고 단언했다. 김 부부장은 또한 북한의 핵을 ‘국체’라고 표현함으로써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김 부부장의 언급은 북한이 선제적으로 핵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며, 특히 남한과 핵 문제를 논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부부장은 담화에서 윤 대통령과 남한 정부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김 부부장은 공산세력과 맞서 싸운 역사를 강조한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또한 “오늘은 ‘담대한 구상’을 운운하고 내일은 북침전쟁연습을 강행하는 파렴치한”이라며 한·미 연합훈련 재개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김 부부장은 “우리 경내에 아직도 더러운 오물들을 계속 들여보내며 우리의 안전 환경을 엄중히 침해하는 악한들”이라고 남한을 비난하고, 이 상황에서 대북 식량 및 의료지원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 인민의 격렬한 증오와 분격을 더욱 무섭게 폭발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부부장의 담화는 사실상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부부장은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며, 윤 대통령 자연인 자체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나타냈다. 나아가 김 부부장은 남한에 대해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 부부장의 담화는 북한 주민이 보는 로동신문 등에도 공개가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위협성 발언으로 보기 어렵다. 김정은 위원장도 지난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기념 연설에서 윤 대통령의 집권 전후 발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며,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을 “극악무도한 동족대결 정책과 사대매국 행위”로 규정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를 일회성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기념 연설에서 “지금 같은 작태를 이어간다면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여정 부부장도 8월 10일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 토론에 나서 북한 내 코로나19 유입의 원인을 남한에서 보낸 ‘색다른 물건’(대북전단 등을 의미)으로 규정하고, ‘아주 강력한 보복성 대응’을 예고했다. 김 부부장은 2020년 6월에도 일부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주도한 바 있다.

 

남·북·미의 한계

한반도의 시계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화염과 분노’와 ‘내 책상위의 핵 단추’로 거친 언사를 주고받은 2017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교착국면을 이어가고 있으며, 북한은 각종 미사일 발사와 핵 물질 생산을 증대시킴으로써 핵 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있다. 북한은 올해 3월 24일 김정은 위원장 참관 하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7형을 발사하고 이를 대내외에 공개함으로써 자발적 모라토리엄을 공식 파기했다. 또한 3월부터 풍계리 핵실험장 복구에 나서 언제든지 7차 핵실험을 단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반도의 긴장고조에도 불구하고 남·북·미 모두 돌파구 마련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 요인들을 담고 있지만 현 교착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파격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윤 대통령이 제안한 ‘담대한 구상’의 전제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추가 설명을 통해 초기에 비핵화 협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한반도 자원 식량 교환 프로그램이나 북한 민생개선 시범사업이 운영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는 모두 대북제재의 면제와 해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프로그램의 핵심인 영변 핵 시설의 영구폐기를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대북제재 해제를 거부했으며, 현재까지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담대한 구상’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구체성을 담고 있지 않다. 또한 ‘담대한 구상’이 경제·군사·정치 3대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플랜이라고 강조했지만 경제분야를 제외한 내용들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이미 지난해 4월 말 대북정책 재검토를 마치고 조정된 실용적 접근(a calibrated practical approach)을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외교안보라인은 조정된 실용적 접근이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트럼프 정부의 일괄타결 방식의 문제를 조정한 것이며, 외교와 억지 그리고 동맹과의 연대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후 북·미 간 그 어떤 직접적 접촉도 성사되지 않았으며, 바이든 정부 외교정책에서 북한 문제의 우선순위는 하향 조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 함께 목차에 포함되었으나 바이든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서 북한 문제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국 양안 관계의 부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여력도 제약이 있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조건 없는 대화라는 제안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북한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구체적인 조건이 포함된 대화이다.

북한은 이미 장기화된 대북제재, 코로나19 국경봉쇄 및 이동통제의 여파, 그리고 반복된 자연재해로 사실상 북한판 ‘퍼펙트 스톰’에 갇혀 있다. 북한의 식량난은 악화되고 있으며, 최근 햇옥수수가 출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가격이 평년 대비 비정상적으로 높은 점은 식량부족 사태를 입증하고 있다. 봄 가뭄과 여름 수해로 가을 수확량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북·중 교역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단둥-신의주 간 육상교역은 중단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건설 노동자를 파견하고 반대급부로 밀과 중공업 제품을 교환하는 북한과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루한스크 인민공화국 간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국제규범 위반이라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북한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없다. 또한 북한이 새로운 무력도발을 감행해도 한·미가 양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담대한 행동’이 필요한 때

한반도 긴장 상황은 남·북·미 모두에게 고비용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북한의 도발과 남한의 원점타격 대응원칙이 충돌할 경우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우려가 있다. 현 상황을 엄중히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남북 대화와 협력의 기조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문제는 ‘담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대한 의지’와 현 교착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담대한 파격’이 있느냐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과의 신뢰를 형성하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 간 또는 우회 채널을 통한 접촉면들을 전방위적으로 넓혀가야 한다. 북한이 윤석열 정부를 불신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의사와 관계없는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협력을 견인해 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대북 특사파견, 파격적 방식의 남북정상회담, 남북이산가족 상봉 제안은 물론 다양한 물밑접촉을 통해 북한을 설득하고 남북 및 북·미 간 당면 현안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과도 한반도 문제의 현상유지를 넘어서는 창의적 외교를 구사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10일 개최된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에서 “나라의 운명이 이대로 결딴나는가 하는 최악의 경우까지도 내다보았다”고 실토했으며, 모든 주민들에 대한 전격적인 이동통제 조치를 단행했음을 인정했다. 북한이 코로나19 방역성공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 상황은 심각하며, 이동통제로 인한 후유증도 확산되고 있다. 최근 북한은 고립무원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중 및 북·러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지만 냉전기 북·중·러 관계로의 회귀가 자신들의 미래가 아니라는 점은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부터 외자 유치를 위한 경제개발구를 북한 전역에 설치했으며,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해 마식령 스키장과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등에 역점을 두었다. 모두 북한이 국제사회와 협력해야 성공할 수 있는 구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그랜드 평화디자인을 실행에 옮길 때다. 독일 통일, 미·중 간 핑퐁외교, 그리고 7.7 선언 및 북방정책 등 역사적으로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중요한 외교안보적 계기의 상당부분은 보수정권에서 성사되었다. 윤석열 정부가 역대 대북·통일정책을 교훈삼아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계기를 마련하는 성찰적 보수가 되기를 기대한다. 지금은 ‘담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대한 행동’이 필요한 때다.

평화재단  hyeonan@p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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