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데 일조한 기업인들이, 이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산업화를 효과적으로 일궈내는 데 일조해 나가야 할 때다.”

21일 열린 전경련 통일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손길승(SK텔레콤 명예회장) 위원장의 포부. 전경련 내 통일 관련 상설위원회는 1997년 발족해 2005년에 폐지된 남북경제협력위원회 이후 9년만이라고 한다. 이번에 초대 위원장을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 맡았다. 2003년 10월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11년 만에 전경련 무대로의 복귀인 셈이다. 전경련 통일위원회 위원은 손 회장을 비롯해 23명의 위원, 9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됐다. 위원들은 김진일 포스코 사장, 지창훈 대한항공 사장, 이갑수 이마트 대표,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등 주요 대기업 대표들이 망라돼 있다. 전문위원은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조봉현 IBK기업은행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등 북한경제·통일 전문가들이 포진돼 있다. 전경련 통일위원회는 앞으로 ▲정부 통일정책에 대한 경제계 의견 제안 ▲북한경제개발을 위한 마스터플랜 수립 및 조사연구 ▲북한 개혁·개방 및 남북통일에 대한 국제 민간경제계 지지 확보 등의 역할을 맡게 된다.

▲ 21일 열린 전경련 통일준뷔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손길승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전경련

하지만 전경련 통일위원회의 기대와 한계는 고스란히 ‘전경련’에 그대로 녹아 있다. 즉, 자금이 많아서 북한의 인프라 건설에는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지만, 문어발식 확장을 통한 사업 독식, 이를 통한 양극화 조장 등 우리나라 대기업이 갖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전경련 말고도 수천 개의 남북 경협 기업들이 멀게는 10년 이상, 가깝게는 수년 동안 농산물, 유통, 제조업, 외식업, 관광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북한과 오랜 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게 2010년 5·24조치로 중단됐고, 그래서 이들 기업과 통일 전문가들은 “5·24조치 해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남북간 경제교류 내지 협력은 기존 남북경협 루트를 최대한 살리면서 남북경협 기업들이 할 수 없는 인프라 등의 영역을 대기업이 뒷받침하는, 철저한 ‘상생’만이 남한은 물론 북한까지 살릴 수 있는 묘책이다. 앞으로 들어설 북한 경제마저 남한 경제의 재판(再版)이어서는 희망이 없다. 그러기에 북한의 개방과 개발, 통일을 기업이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전경련 통일위원회는 남북 경협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선배 남북경협인들을 만나서 배워야 한다. 어쩌면 거기서 뜻밖의 대기업-중소기업의 상생이란 부수익도 생겨날 수 있을 거니까.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와 같은 민간인이 북한과 먼저 접촉하는 것이 좋겠다며 나를 아예 특사로 임명해 북한에 다닐 수 있도록 해줬다.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재임 기간(1988~1998)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을 20여 차례 만났다.”(8월 22일자 조선일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말이다. 김 전 회장은 오는 26일 출간되는 자신의 대화록에서 대북특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었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대북지원 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선 김 전 회장이 북한 남포 개발 등에 공을 기울여왔었다는 얘기는 있었다. 하지만 15년 전 대우자동차 문제 등으로 대우가 부실기업으로 대두되면서 대우그룹 해체를 불러왔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성공신화도 결국 묻히고 말았다.

반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김 전 회장처럼 재벌 회장이지만 상반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김 회장이 비공개적으로 대북 활동을 한 반면 정 회장은 공개적으로 했다. 김 회장이 기업인으로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정치적 역할을 떠맡은 반면, 정 회장은 철저히 기업인으로서(일각에서는 ‘장사꾼’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역할을 수행했다. 정 회장은 1998년 6월, 84세의 나이로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갔다. 남북간 대결의 상징인 판문점을 사상 처음으로 민간인이 소떼와 함께 열어제친 역사적 사건은 국민들 뇌리에 평화와 통일 두 글자를 강하게 새겨넣었다. 그때부터 현대는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통일기업’ ‘국민기업’으로 자리잡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가능했던 것도 그 파장 때문이었다. 북한을 상대로 한 기업인이 ‘수익’이라는 순수한 동기에 치중할 때 정치라는 의외의 부수익도 생긴다는 반증인 셈이다.

“통일은 평화 다음에 온다. 평화를 위해서는 동명 상태의 신뢰 프로세스를 깨워 가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신뢰를 쌓자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려면 5‧24조치를 풀고 금강산을 열어야 한다. 민간인들의 대북 지원사업 참여의 길을 활짝 열고 지자체들이 각자의 크기에 맞는 북한의 지방행정단위를 골라 도시 간 교류협력을 풀가동해야 한다.”(8월 22일자 중앙일보)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의 칼럼 ‘대북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의 일부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사실 김영희 대기자는 세미나 장소에서도 보수 언론인으로서는 드물게 ‘바른 소리’를 내왔다. 그런 성향이 칼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간 평화관계가 수립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화하고 신뢰를 쌓아야 하는데 지금처럼 이명박 정부가 쳐놓은 족쇄 ‘5‧24조치’와 금강산 관광 중단부터 풀라는 것이다. 마침 방한한 미국 재무부 고위당국자가 "금강산 관광 재개해도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가려는지가 중요하다"고 21일 밝혔다. '금강산 관광 재개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우리 정부의 우려를 들어준 만큼 금강산 관광을 재개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지금의 대북지원, 남북교류는 하루빨리 민간단체나 지방정부로 이전하라는 게 김영희 대기자의 권고다.

이미 북한‧통일 전문가들이 ‘이 방법밖에 없다’며 숱하게 얘기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에 와서도 통 씨알이 먹히지 않고 있다. ‘통일 대박’ ‘드레스덴 선언’ ‘신뢰 프로세스’ 등이 말뿐이라는 의심과 혹평을 받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의 내치(內治)를 들여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국정원 정치개입, 간첩 증거 조작, 4대강 문제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 꽉 막힌 내치는 바깥으로 문을 열면서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바깥으로 문을 여는 방법과 기술은 이미 나와 있다. 김영희 대기자의 방법대로 하면 된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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